2026.01.24 보고서 기반

독재의 어둠을 가른
최초의 시민 항쟁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학생들의 외침은 어떻게 시민 전체의 거대한 횃불이 되었는가?

왜 부마인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본 보고서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을 넘어,
학생 주도의 시위가 어떻게 시민 전체의 항쟁으로 확산되었는지
그 역사적 경로를 추적하고, 그 속에 담긴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항쟁의 발발 배경

부마민주항쟁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장기간 누적된 정치적 억압경제적 파탄이 맞물려 폭발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 정치적 억압

유신독재 18년,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는 철저히 유린당했습니다.

📉 경제적 위기

민생고는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었습니다.

항쟁의 전개와 확산

참여율 그래프를 통해 시위의 폭발적인 확산 과정을 확인하세요.
아래 타임라인의 각 단계를 클릭하면 상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시위 참여도 및 강도 추이 (추정)

오전 10시경, 이진걸과 남성철의 주도로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었습니다.

교내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이 진입했고, 학생들은 '시내로 나가자!'고 외치며 교문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 구호: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남포동 부영극장 앞 등 시내 중심가로 진출한 학생들에게 시민들이 합세했습니다.

상인들과 시민들은 김밥과 물을 주고, 가게 셔터를 내리고 불을 끄는 소등 시위로 학생들을 보호하며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상황: 시민들의 소등 시위 ("불 꺼라!")

항쟁은 마산으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경남대생과 시민들이 결합하며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공화당사 등 정권의 상징물이 타격을 입었고, 박정희 사진이 불태워졌습니다. 위수령이 발동되었으나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 상황: 파출소 투석전 및 공화당사 공격

민주선언문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이진걸, 남성철 등이 작성하여 배포한 선언문은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오른쪽(모바일: 아래)의 선언문 본문에서 강조된 문구를 클릭하여 그 의미를 확인해보세요.

문구를 선택하세요

선언문의 핵심 내용을 분석해 드립니다.

📜

민주선언문 (발췌)

우리는 학원내의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한다. 과 학원, 언론의 자율화와 학생회의 민주화와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우리는 언론 · 인권 · 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 ... 민주주의 생명이며 본질적인 요청인 한다.

우리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당위적인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의 자립경제에 대한 무방향 역방향성을 고발한다. ... ... 부실기업, 노사문제 등이 파생됨을 명확히 인식한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정권 물러나라!"

학우들이여! 효원학우들이여! 민족의 앞날과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되풀이된 청원과 요구는 되풀이된 억압으로...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

10시 도서관 앞.

항쟁 바로 알기 퀴즈 (O/X)

Q1. 부마민주항쟁은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Q2. 시민들은 시위에 무관심하여 학생들을 돕지 않았다.

Q3. 부마항쟁은 유신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 역사적 의의

🤝

연대의 힘

경제적 불만과 정치적 억압이라는 공통의 분노가 학생과 시민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철옹성 같던 독재 권력도 시민의 연대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

기록과 기억의 중요성

유치준 씨의 사례처럼, 은폐된 죽음이 40년이 지나서야 규명되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과제입니다.

🇰🇷

오늘의 민주주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의 거리에서 흘린 평범한 시민들의 피와 땀, 숭고한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다."